어떤 목사님이 산 기도를 하기위해 어둔 밤안개가 잔뜩 낀 산길을 올라가다가 앗~차차!!...
그만 발을 헛딛어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캄캄한 어둠속 마치 지옥으로 떨어지는듯한 절망감에 본능적으로 뻗은 손에 무언가가 잡혔습니다. 그것은 바위틈에서 자라난 작은 나무그루터기였습니다.
잡긴 했으나 그것도 잠시....
나무그루터기는 사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우~지~지~직 서서히 뽑혀 나오기 시작합니다. 다급해진 목사님이 외쳐댑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그러자 어디선가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럼 그 손을 놓아라!“
엥~?? 손을 노라고라오..???
절망감에 캄캄한 허공을 향해 다시 고개를 쳐든 목사님이 죽을힘을 다해 외쳐댑니다
“거기 누구 다른 분 안계세요..?? 사람 살려주세요..!!
한시간... 두시간.....
거의 다 뽑혀나온 나무그루터기와 이젠 손목의 힘도 다 풀려버린 그때 서서히 안개가 걷히면서 동이 터 옵니다. 아~! 이젠 죽었구나!
체념하며 살짝 발아래를 내려다본 목사님은.....으~아~아~...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땅바닥과 목사님의 발과의 거리는 불과 50cm....!!!!!!!
.....................................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과의 소통을 도구로, 이신칭의(以信稱義)란 관계를 화평의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로서 반문화적인 삶에 익숙한 부류에 속하나
닥친 문제를 믿음만으로는 해결을 할 수 없어 “하나님은 고통의 이 순간 어디에 계시는가? “정말 하나님이 내 문제에 개입하고 계신가? 라는 실존적인 의문에 절망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주님도, 다윗도 그러한 불통(不通)의 순간에 견딜 수 없는 심정을 토로하십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막 15;34)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 1)
세상을 살다보면 움켜쥐어서 얻는 것이 있고, 움켜쥠으로써 오히려 잃는 것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가이사랴)에서 바울 일행을 태우고 터키(루기아)로 향하던 배가 뵈닉스 항을 향해 출발한지 얼마 못가서 광풍과 성난 파도를 만나 중심을 잃고 요동을 칩니다.
이 때 노련한 뱃사람들이 취한 행동은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었답니다.
마침내 곡물(밀)까지 버린 후에야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행 27장)
이렇듯 때에 따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들조차도 버려야할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버려서는 안 될 것이 있답니다.
배 안에 있던 자의 태반은 구원의 여망마저 없었으되,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었고 결국 이 믿음은 그들을 살렸습니다.
믿는 자로서 우리의 삶에 위기의 광풍이 밀어닥칠 때 과감하게 버릴 것을 버려서 삶의 무게를 줄이되 또한 믿음만은 지켜야할 이야기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영영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 속 반인반우(半人半牛)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간 <테세우스>가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은 실타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미궁에 들어갈 때 실 끝을 문설주에 묶어놓았고, 미궁을 헤매는 동안에도 끝까지 실 끝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우리 인생이 헤어날 수 없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절망의 수렁에 빠질 때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다 버려도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족한 벼랑에서, 광풍의 위기에서, 절망의 미로에서 살아날 수 있답니다.
우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걸작이요,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하신 피조물이지만,
이성의 오만으로 신(神)을 잃어버린 이 시대,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잊다보니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놓치고 인생의 좌표까지 까먹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미운오리새끼처럼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인생길에서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 1) “자기 태에서 태어나 그 젖을 물리던 어미가 그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사49;14)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상실된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대신하는 인간의 공의가 판을 치는 사회는 긍정의 힘과 믿음의 힘, 영성과 지성을 혼동하다 못해 같은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힘과 능을 기준하여 벅찬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두 명의 족장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뺀 열 명의 족장들이 범했던 소위 현실의 높은 벽에 짓눌린 낙심과 실망의<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집니다.(민13;33)
자기정진에 의한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헛된 종교들은 행위(Work)를 역설하나, 그러나 우리의 복음은 은혜(Grace)를 역설합니다,
기독교신앙은 자기구원(save yourself)을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힘써 해보자(Do)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다 해놓은 것(Done)을 믿고(belive) 감사함으로 순종하는“자기부정(deny yourself)을 말합니다.
세상 앞에 서면 우리는 이방인이요 나그네이나, 하나님 앞에서면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기(벧전2;9) 때문에
당연히 세상과의 비교는 실패의 지름길이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성공의 지름길이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체념도 하나의 슬기로움인 것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 6)
Man's extremity is God's opertunity.
어떤 목사님이 산 기도를 하기위해 어둔 밤안개가 잔뜩 낀 산길을 올라가다가 앗~차차!!...
그만 발을 헛딛어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캄캄한 어둠속 마치 지옥으로 떨어지는듯한 절망감에 본능적으로 뻗은 손에 무언가가 잡혔습니다. 그것은 바위틈에서 자라난 작은 나무그루터기였습니다.
잡긴 했으나 그것도 잠시....
나무그루터기는 사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우~지~지~직 서서히 뽑혀 나오기 시작합니다. 다급해진 목사님이 외쳐댑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그러자 어디선가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럼 그 손을 놓아라!“
엥~?? 손을 노라고라오..???
절망감에 캄캄한 허공을 향해 다시 고개를 쳐든 목사님이 죽을힘을 다해 외쳐댑니다
“거기 누구 다른 분 안계세요..?? 사람 살려주세요..!!
한시간... 두시간.....
거의 다 뽑혀나온 나무그루터기와 이젠 손목의 힘도 다 풀려버린 그때 서서히 안개가 걷히면서 동이 터 옵니다. 아~! 이젠 죽었구나!
체념하며 살짝 발아래를 내려다본 목사님은.....으~아~아~...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땅바닥과 목사님의 발과의 거리는 불과 50cm....!!!!!!!
.....................................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과의 소통을 도구로, 이신칭의(以信稱義)란 관계를 화평의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로서 반문화적인 삶에 익숙한 부류에 속하나
닥친 문제를 믿음만으로는 해결을 할 수 없어 “하나님은 고통의 이 순간 어디에 계시는가? “정말 하나님이 내 문제에 개입하고 계신가? 라는 실존적인 의문에 절망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주님도, 다윗도 그러한 불통(不通)의 순간에 견딜 수 없는 심정을 토로하십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막 15;34)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 1)
세상을 살다보면 움켜쥐어서 얻는 것이 있고, 움켜쥠으로써 오히려 잃는 것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가이사랴)에서 바울 일행을 태우고 터키(루기아)로 향하던 배가 뵈닉스 항을 향해 출발한지 얼마 못가서 광풍과 성난 파도를 만나 중심을 잃고 요동을 칩니다.
이 때 노련한 뱃사람들이 취한 행동은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었답니다.
마침내 곡물(밀)까지 버린 후에야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행 27장)
이렇듯 때에 따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들조차도 버려야할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버려서는 안 될 것이 있답니다.
배 안에 있던 자의 태반은 구원의 여망마저 없었으되,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었고 결국 이 믿음은 그들을 살렸습니다.
믿는 자로서 우리의 삶에 위기의 광풍이 밀어닥칠 때 과감하게 버릴 것을 버려서 삶의 무게를 줄이되 또한 믿음만은 지켜야할 이야기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영영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 속 반인반우(半人半牛)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간 <테세우스>가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은 실타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미궁에 들어갈 때 실 끝을 문설주에 묶어놓았고, 미궁을 헤매는 동안에도 끝까지 실 끝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우리 인생이 헤어날 수 없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절망의 수렁에 빠질 때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다 버려도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족한 벼랑에서, 광풍의 위기에서, 절망의 미로에서 살아날 수 있답니다.
우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걸작이요,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하신 피조물이지만,
이성의 오만으로 신(神)을 잃어버린 이 시대,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잊다보니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놓치고 인생의 좌표까지 까먹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미운오리새끼처럼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인생길에서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 1) “자기 태에서 태어나 그 젖을 물리던 어미가 그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사49;14)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상실된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대신하는 인간의 공의가 판을 치는 사회는 긍정의 힘과 믿음의 힘, 영성과 지성을 혼동하다 못해 같은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힘과 능을 기준하여 벅찬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두 명의 족장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뺀 열 명의 족장들이 범했던 소위 현실의 높은 벽에 짓눌린 낙심과 실망의<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집니다.(민13;33)
자기정진에 의한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헛된 종교들은 행위(Work)를 역설하나, 그러나 우리의 복음은 은혜(Grace)를 역설합니다,
기독교신앙은 자기구원(save yourself)을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힘써 해보자(Do)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다 해놓은 것(Done)을 믿고(belive) 감사함으로 순종하는“자기부정(deny yourself)을 말합니다.
세상 앞에 서면 우리는 이방인이요 나그네이나, 하나님 앞에서면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기(벧전2;9) 때문에
당연히 세상과의 비교는 실패의 지름길이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성공의 지름길이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체념도 하나의 슬기로움인 것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 6)
Man's extremity is God's opertu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