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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지망월(見指忘月)

오종일
2018-07-08
조회수 664

견지망월(見指忘月)이란 말이 있습니다,

즉 “달을 보라“고 가리켰지만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바라본다는 뜻이랍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곳곳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라보는 자의 잘못일 수도 있고, 가리키는 자의 잘못일 수도 있으나, 예수를 바라보라고 가르켰지만 가르키는 그 손가락만을 바라보는 잘못된 신앙생활에 대한 책임은 결국 바라보는 자에게 귀책 된다는 점에서는 바라보는 자의 잘못일 수밖에 없습니다.

견지망월한 신앙은 영적으로 갈급한 심령을 잠시 해갈하는 자기기만일 뿐, 성숙과 성장(聖化)을 위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요절신앙(要節信仰)에 빠지게 하고, 마치 티벹 불교에서 "마니차"를 돌리며 자기신앙을 자위하듯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합니다,

결국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우리의 삶에 힘과, 위로와, 지혜를 주지 못하며, 삶과 신앙을 분리시킴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메마르게 하고, 나아가 견지망월(見指忘月)한 믿음이 충만할 때, 우리는 기독교의 이름을 빙자한 “종교적 공갈”(마틴 루터) “종교적 사기“에 걸려들어 몸과 마음 영혼이 몸살을 앓게 됩니다,(딤후6;3-5)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알기 위해 바라봐야 하고, 알기 때문에 바라봐야 할 이 예수는, 역설적으로 소위 외식하는 바리새인 등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한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율법(律法)이 가리키는 그리스도는 보지 못하고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율법에 착념(着念)함으로 인해 정작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짓을 자행했습니다.(갈3;24)

이 십자가의 처형은 견지망월한 믿음이 부른 최악의 사건(事件)입니다,

체험적경험이 요구되는 믿음에 있어, 이러한 믿는 것과 아는 일의 분리를 가져오는 원인이자 결과인 견지망월(見指忘月)한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본질을 훼손(제2계명)하고 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제3계명)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길을 따라 나그네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그리고 오직 예수의 이름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딤후3;15),

설교는 바로 이 계시의 주체이며 동시에 내용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우리의 영혼을 그에게로 인도하여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요14;6)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인격을 변화시켜, 종국적으로는 믿는 자의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사역의 전략입니다.

설교자들은 이러한 성령님의 말씀사역의 전략인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야 하고,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즉, 설교의 본질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성령의 사역이라고 합니다,(존 녹스)

만약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설교는 전혀 무익하고 공허한 외침 일뿐, 말씀을 구성하고 그것을 회중에게 적용을 완성하는 것 역시 성령님의 역사라고 합니다,

“설교 전달의 핵심은 인간의 지혜를 드러내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도록 하는 것이다(퍼킨스)

“ The Holy Spirit is always Jesus-centered and Christ-centered!

성령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빛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 명확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더 분명하게 합니다.

우리의 관심과 이목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시키십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설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설교는 말씀으로 회중 가운데 걸어 다니시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요한복음 1:14)

여기에 말씀의 성례가 있답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이 성경으로부터 선포하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회중 안으로 들어가시도록 힘써야 하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회중사이를 다니시며 상처 난 자, 연약한 자, 곤고한 자에게 위로와, 치유와, 회복과 그리고 힘

과 용기를 주시는 것으로, 이러한 체험을 우리는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런던의 모 교회에서 어떤 한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난 사람들은 “아, 그 설교자가 참으로 대단하지!”하고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난 다음 그 사람들은 “아, 그리스도가 참으로 대단한 분이지!”라고 감탄했답니다.

이렇듯 설교를 듣고 난 후 청중의 반응은 설교자의 언변이나 지식보다, 설교자가 전하는 그리스도가 가슴에 다가오도록 하는 설교가 명설교입니다.

즉,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설교는 연설이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백이지 인간의 그 어떤 기술이 아닙니다, 따라서 때로는 딱딱하고 재미없을 수도 있으나 

설교의 근거는 이성과 권위 있는 말씀에 있으므로 진지함이 있어야 합니다.

유치한 말로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교는, 물을 섞은 포도주와 같으므로, 참된 설교자는 말의 기교나 화려한 말솜씨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면서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던 사실(출 12:8; 민 9:11)을 유추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누룩 없는 맛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에 대해서도 순전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 가운데 선포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말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설교할 때 사람의 지혜나 자신의 능력으로 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4-5)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설교)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12)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설교에 대해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살전2;3-5)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이러한 바울 사도는 자기의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단언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또한 설교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중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 설교자의 설교가 내게는 너무 유치하게 들리거나 너무 어렵게 들릴수도 있습니다.

이에 관련하여 사도바울은 설교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구원의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전도설교(케리그마)”이며,

둘째는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성화(믿음의 성장 성숙)를 위한“경험적, 교육적 설교(디다케)입니다,

“설교(preaching)”라는 단어는 보통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한 진리를 증거하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증거 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설교자는 <복음 설교>와 <경험적, 교육적 설교>사이의 균형을 잡아가며 설교를 합니다,

믿는 자 모두가 구원받아 새사람으로 거듭나고, 완전해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설교자는 복음 전도자의 역할과 성도를 세우는 일(성화)을 함께 수행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신앙 실천에 관한 가르침으로, 거룩한 영적 세계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룩한 삶의 실천에 대해서 가르치는 이성적인 신학이자 윤리적인 신학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양자에 다 관심을 가지고“은혜”와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이 균형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지성주의의 덫에 걸려들지 않도록 막아줄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살아 있는 교제를 유지하도록 합니다.

이렇듯 설교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해석을 사용하셔서 듣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는 일과,이미 영적 생명을 주신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에 은혜를 주시되,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하셔서 더욱 힘 있고 풍성하게 하시고, 믿음 안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생명을 성장시키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더욱 강력하게 드러내도록 역사하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설교는 단순한 진리의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요- 말씀의 선포가 있는 한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절망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설교를 통해,청종하는 회중들의 생사문제와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짐을 믿어야 합니다.

“설교는 (영원한 진리인) 성경의 세계와 (변화무상한) 현실의 세계 사이에 다리 놓기다”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말처럼,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주는 역할을 하며, 따라서 설교는 말씀과 세상에의 연관성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하워드 헨드릭스)

오늘날 교회들이 그리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은 더 이상 틀린 말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렇게 허약해지고 있는 것은, 요즘 말로 “정크푸드”(junk food; 햄버거 등 영양가는 없고 칼로리만 높은 인스턴트 음식)를 너무 많이 먹어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방부제가 가득 든 온갖 가공 식품에 길들여졌고, 그 결과 그런 음식을 먹어도 건강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와 영적 깊이 없이 말씀을 구호처럼 외치는 삯꾼 목사들과, 그저 기도, 전도, 봉사라는 것만 열심히 하면 영적으로 충만한 줄 알고,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된 감정적 엑스터시를 영성으로 착각하는 열심히 특심인 신자들은 영적골다공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암 8:11/히 5:12~13/엡 4:14)

흔히<로마서 10장 9절>에 근거해서 소위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구원 받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성화와 성숙에 대한 경험과 교육에 대해 소극적,부정적인 결과,영적으로 건조하고 강퍅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믿음으로 결국 영성이 결핍되고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일에 스스로 실패하게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 3장>에서 이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는 바, 이미 믿고 많은 것을 받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서 그들이 더욱 많은 축복, 즉,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가득하기를 계속적으로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어린 아이”(엡 4:14)같은 기독교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며, 죤 브라운(John Brown)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그들은 적절한 영양 섭취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으므로 영적인 식욕과 소화력을 잃어버리고 제2의 유아기로 퇴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축복을 믿는 것과, 그 가능성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 사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별력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이와 같은 사실들을 상기하면서 손가락이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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